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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아직 꿈이야

꿈을 꾸는 나는 꿈속에 있었어 / 설명이 되지 않는 어떤 날은 깊은 물에 잠기고 말아 / 힘껏 뛰어도 멀리 갈 수 없는 / 발이 땅에 붙어버린 꿈을 꾸기도 해 / 꿈을 꾸며 나에게 말했어 아침이 보고 싶다고 / 빨리 말하고, 천천히 걷고 싶은 오솔길은 멀지 않은데 / 새가 노래하는 아침은 더디 오고 있어 / 두 발자국 걸으면 한 발자국 뒤돌아보는 밤 / 발이 땅에 붙어 걸을 수가 없었어 / 텔레파시를 네게 전송하는 아직 밤이야 // 꿈속에 떠다니던 단어가 맞춰지고 있었어 / 먼동이 오고 있었으니 / 큰 물결, 작은 파장, 수평선 붉은 해 / 거대한 호수의 가슴에서 빠져 나오고 있어 / 알을 깨고 나온 아프락사스의 날갯짓처럼 / 새벽을 기다렸던 물새가 날고, 나는 입을 꼭 다물고 / 천국의 문을 통과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 왔던 길을 되돌아 가슴보다 큰 태양을 안아주었지 / 차갑기도, 뜨겁기도 한 태양이 부딪히며 안겨 오는데 / 꿈을 꾸는 나는 꿈속에 있었어 / 잃어버린 단어들이 퍼즐처럼 맞춰지는 아직 꿈이야 / 날마다 내 속에서 태어나기도 하는 아름다운 사람이야       뒤돌아보면 걸어온 길이 보인다. 곧게 뻗은 길도 보이지만 구불구불 어지러운 길도 보인다. 늘 평탄한 길을 걷는 사람은 없을 거라는 스스로의 위로에 하루 해가 저물고 있다. “나는 오늘 어떤 내가 되어가는가? 너 자신을 알고, 너 자신이 되는 법을 배워라. 너 자신과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아메리칸 인디언, 체로키족의 구전이다. 과연 내가 나를 알까? 안다면 얼마나 알까? 나는 나에게 얼마나 친밀한 존재인가? 측은한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바람이 불어오는 언덕 위에 서 있다. 언덕 아래로 올망졸망 집들이 보이고 풀숲 같기도 한 나무들이 희끗희끗 보이는 지붕 사이에 끼여 서 있다. 장난감 같은 자동차들이 꼬랑지를 맞대어 지나가고, 그 옆 인도에는 신기하게도 개미처럼 움직이는 사람들이 무리 지어져 있다. 그 무리 중 혹 한 사람이 멀리 언덕 위에서 어떤 사람이 이쪽을 향해 눈길을 주고 있음을 알아차렸다면 그는 어떤 생각을 할까? 서로의 다른 위치에서 어떤 생각을 하며 서로를 바라보고 있을까?   ‘공유몽’이란 단어가 있다. 동시에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을 말할 때 쓰는 말이다. 오래 소식이 없던 친구를 생각했는데 그 친구에게 불현듯 소식이 오거나, 어떤 사람과 우연히 여러 번 마주치게 되어 말을 걸었는데 그 사람을 통해 가장 필요했던 정보를 얻게 되는 상황을 경험해 본 적이 있는가? 이처럼 동시적으로 발생하는 의미 있는 일치를 종종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이는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율의 원리와는 다른 시간과 의미로 연결된 무 인과적인 원리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현상은 꿈 속에서도 종종 일어난다. 꿈 속에서 텔레파시를 경험하는 것은 가족, 친척, 친구, 애인 등 가까운 관계에서 흔히 보고되는 현상이다. 깊은 감정과 정서의 교류가 있을 때 텔레파시로 연결되는 경우가 있다고 꿈을 연구한 학자들의 입을 통해 알려지고 있다. 전쟁이나 재해로 헤어진 부모와 자식 간, 연인들이나, 비슷한 종류의 깊은 공포나 열정을 나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꿈에 텔레파시가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깨어 있을 때 이성적인 세계관을 가진 사람의 꿈에 텔레파시는 자주 등장한다고 한다. 의식에서 배제하고, 현실에서 금기로 여기고 무시한 것들이 무의식에 자리 잡게 된다는 점을 상기시켜 보면, 현대인의 꿈에 텔레파시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 같다.     반복되는 꿈이 의식이 일상에서 알아야 할 많은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다는 사실도 인지하게 된다. 꿈을 꾸면서 내가 꿈속에 있다는 걸 의식한다면 꿈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은 꿈을 깨는 순간 사라지게 되지만 그 상황은 어떤 모양으로든 의식의 깊은 창고에 여전히 남아 있다는 아이러니를 떼어낼 수 없다. 불현듯 장자의 호접지몽(나비의 꿈)이 생각나는 밤이다. 그리고 나는 아직 꿈속에 있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아메리칸 인디언 파장 수평선 언덕 아래

2024-07-15

2022년 특별 기획 / 이종호의 시민권 미국사 <1> 아메리칸 인디언

  ━   2022년 특별 기획 / 이종호의 시민권 미국사 <1> 아메리칸 인디언      이민자는 두 개의 조국을 가진 사람이다. 마음엔 언제나 떠나 온 조국을 품고 있을지라도 현실에선 새로운 조국을 보듬어야 한다. 그 첫걸음은 이 땅의 역사를 아는 것이다. 이민국이 발간한 ‘미국 시민권 시험 예상 문제집’에도 100개 중 29개가 역사 문제다. 거기에 정부조직, 정치 제도 등 역사적 배경을 알아야 하는 문항까지 더하면 거의 반이 역사 관련 문제다. 미국 시민권 시험은 사실상 미국 역사 시험인 셈이다. 시민권 시험 문제집에 실린 역사 문항을 중심으로 이민자라면 최소한 알아야 할 미국 역사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   백인들이 오기 전 1000만 명의 원주민이 있었다    배신·약탈·살육의 500년 원죄    연방정부 2010년에 공식 사과    원주민과 맺은 수백 건 약속 중  오직 하나 지킨 것은 '땅 뺏기'        2010년 5월 20일은 아메리칸 인디언에겐 매우 뜻깊은 날이었다. 연방의회가 정부 차원에서  미국의 원주민이었던 인디언에 대한 과거의 폭력 행위와 잘못된 정책에 대해 공식으로 사과했기 때문이다. 이날 캔자스 출신 공화당 샘 브라운백 상원의원은 연방 정부에 대항하다 숨진 인디언 부족 지도자 36명이 묻혀있는 워싱턴 의회 묘지에서 과거 인디언들에 대한 사과 결의안을 낭독했다. 결의안에선 또 인디언들이 현재 보호구역 안에서 겪고 있는 빈곤과 폭력, 학대, 무시에 대해서도 유감을 표시하면서 인디언 부족들의 권익향상과 복지증진을 위한 미 정부의 약속도 재확인했다. 행사에는 체로키, 촉토, 무스코지 등 원주민 부족 대표들이 참석했다.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에 연방 정부 차원에서까지 사과했을까. 이를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선  미국 독립 이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카리브해 산살바도르 모래톱에 처음 닻을 내렸다. 콜럼버스는 자신이 상륙한 곳이 황금과 향료의 땅 인도라고 생각해 그곳 사람들을 인디언(Indian)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들은 인도인과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었다. 붉은 피부, 툭 튀어나온 광대뼈, 굴고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몽골계 후예로 아시아 시베리아로부터 얼어붙은 베링 해를 건너 3만 년 전부터 북미 땅에 터를 잡았던 사람들이었다.     콜럼버스의 북미 대륙 도착은 서구 역사에선 신대륙 발견으로 미화됐지만, 원주민들에겐 피로 얼룩진 수난사의 시작이었다. 미국의 서부 개척사는 영웅적인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인디언 입장에선 처절한 멸망사인 것과 마찬가지다. 미국이 자랑하는 프런티어 정신은 백인 입장에서는 모험과 용기, 인내를 의미하는 진취적 이념이었지만 인디언에게는 자신들의 땅과 목숨을 빼앗아가는 파괴와 탐욕의 저주였다.     미국 인디언들은 콜럼버스 도착 이후 근 400년 동안 이리 쫓기고 저리 흩어지며 들판의 짐승처럼 피 흘리며 죽어갔다. 19세기 말까지도 연방군은 수많은 병력과 비용을 투입하여 인디언 소탕전을 끊임없이 벌였다. 인디언 말살정책은 링컨의 노예해방 선언 이후에도 계속됐다. 1868년 통과된 수정헌법 14조는 노예였던 흑인까지 포함해 만민평등권을 부여했지만, 원주민 인디언은 대상이 아니었다. 1883년 연방대법원은 인디언은 미국 땅에서 태어났어도 이방인이라고 판결했다. 연방의회가 인디언 원주민에게도 시민권을 준다는 법안을 통과시킨 것은 1924년에 이르러서였다.     콜럼버스 도착 직후 거의 1000만 명에 가까웠던 원주민 인구는 19세기 말 25만 명으로까지 줄었다. 줄어들던 인구는 1917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출생률이 사망률을 앞지르며 회복되기 시작했다. 인디언 보호구역은 1851년 처음 만들어졌다. 말이 보호구역이지 인디언 격리 수용을 위한 강제 주거 제한 구역이었다. 지금은 전국 326곳에 인디언 보호구역이 있다.       연방 센서스국 2021년 통계 자료에 따르면 아메리칸 인디언 인구는 혼혈 포함 약 679만 명이다. 전체 미국 인구의 2.09%다. 원주민이 가장 많은 주는 캘리포니아로 76만 7000여명이 살고 있고 오클라호마(52만), 애리조나(39만)가 그 뒤를 잇고 있다. 조지아에는 약 10만 명이 살고 있다. 연방정부가 인정한 미국의 전체 원주민 부족 수는 574개에 이른다. 센서스 조사에 따르면 아메리칸 원주민의 평균수명은 일반 백인보다 2년 2개월이 짧고, 20.3%가 빈곤선 이하의 소득 수준이다.            버지니아주 제임스타운은 1607년 북미 대륙에서 처음 세워진 영국 이주민 정착지였다. 제임스타운 개척 당시의 무용담은 미국의 탄생지 신화가 되어 모든 미국 역사책의 첫 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미국의 탄생지로 알려진 이곳을 세운 사람들은 광산 채굴과 탐사를 목적으로 영국 국왕의 특허장을 들고 온 사람들이었다.     디즈니 만화영화의 주인공으로 더 유명한 포카혼타스라는 11세 인디언 추장 딸이 존 스미스라는 백인 선장을 구출하는 전설 같은 이야기는 당시를 배경으로 만들어졌다. (포카혼타스는 17살 때 존 롤프라는 백인과 결혼해 영국으로 건너가 사회적 명사가 되었다. 훗날 레베카라는 세례명으로 개명했으며 천연두로 죽었다.)     처음에 그 지역에 살던 원주민 포와탄(Powhatan) 인디언들은 제임스타운 영국인들에게 식량을 나눠주었고 옥수수와 고구마 재배법을 알려주었으며 숲의 풍습도 가르쳐 주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제임스타운은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관계는 별로 오래가지 못했다. 정착민들은 원주민을 배신했고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 영국 정착민들은 곧 그들과 반목하면서 그들을 약탈하고 죽이기 시작했다.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플리머스에 도착한 청교도들에게도 똑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원주민들과 우호 관계를 유지하며 농사법 전수와 식량 지원을 받으며 혹독한 겨울을 이겨냈다. 땅에 대한 소유 개념이 없던 원주민들은  땅을 소유해야겠다는 백인들의 이상한 관습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모두가 나눠 써야 할 땅이었기에 그들의 정착을 아낌없이 도왔다. 추수감사절의 감동스러운 유래도 이때 생겼다. 하지만 이들 역시 다른 이주민들이 몰려오면서 숫자가 많아지자 이내 감춰둔 이빨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624년 네덜란드인들은 불과 24달러 정도의 금속 냄비와 낚싯바늘, 유리구슬 등으로 인디언 추장을 꼬드겨 지금의 맨해튼을 빼앗았다. 모든 게 이런 식이었다. 북미 대륙에 발을 들인 유럽인들은 처음엔 원주민들과 우호적 관계를 맺었지만 결국은 배신과 약탈, 살육으로 그들의 모든 것을 앗아갔다.     1834년 연방의회는 ‘인디언과의 교역과 접촉 규제 및 변경 평화 유지 조례’를 통과시켰다. 미시시피강서쪽지역이 인디언 주거지역이며 백인들은 허가 없이는 이 지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오랫동안 인디언들과 분쟁을 겪어 온 연방정부가 내놓은 화평책이었다. 하지만 지켜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삶의 터전을 넓혀간 백인과 그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따라 온 군대에 의해 인디언의 설 자리는 점점 줄어들었다. 1700년대 후반부터 100여년간 연방정부와 인디언 부족 간에는 371건이나 되는 조약이 맺어졌지만 모두 휴짓조각이 되었다.   한 인디언 추장은 이런 말을 남겼다. “백인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약속을 했다. 그러나 지킨 것은 단 하나다. 우리 땅을 먹겠다고 약속했고, 결국 먹어 치웠다."   이종호 기자〈lee.jongho@koreadaily.com〉    유럽인들이 오기 전에 미국에는 누가 살았나?(Who lived in America before the Europeans arrived?)     아메리칸 인디언(American Indian)이라고 대답하면 된다. 인디언(Indian)이나 네이티브 아메리칸(Native American), 원주민(Indigenous people) 등으로 대답해도 정답으로 인정해 준다. 2021년 현재 알래스카 원주민을 포함한 아메리칸 인디언은 약 679만명이다.  미국 아메리칸 인디언 부족들 아메리칸 인디언 과거 인디언들

2022-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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